
8월 31일 방송된 EBS1 ‘다큐프라임’ ‘당신의 글씨는 안녕한가요?’에서는 스마트 기기와 인공지능이 손으로 쓰는 시간을 빠르게 줄이는 환경에서 악필이 늘어나는 현실과 손글씨 교육의 의미를 살펴봤다.
‘악필’의 시대, 무너지는 아이들의 글씨
글씨 때문에 일상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이 있다. 학교와 가정에서 체계적인 글씨 교육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악필로 고민하고, 성인이 된 뒤에도 취업이나 자격증 시험에서 자신의 글씨와 마주한다. 글씨 교정 학원을 찾은 아이들의 사례를 통해 손글씨를 쓸 기회가 줄어든 환경이 악필로 이어지고, 글씨가 학교생활과 일상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현실을 드러냈다.
들쭉날쭉한 글씨 때문에 교사가 서술형 답안을 알아보지 못해 오답으로 처리하거나, 발표 시간에 학생이 자신이 쓴 글씨를 읽지 못해 곤란을 겪는 사례도 소개됐다. 과거에는 ‘깍두기 노트’에 글씨를 반복해 쓰고 노트 필기와 일기, 편지를 통해 필체를 다듬었지만 지금은 손으로 쓰는 경험 자체가 줄어든 상황이다.
손글씨를 쓰는 능력 역시 사용하면서 길러지는 기능이다. 서울대학교 뇌인지과학과 이인아 교수는 뇌의 신경가소성에 주목해 손글씨를 쓰는 경험이 줄어들수록 관련 기능도 퇴화할 수 있음을 살펴보며, 글씨를 잘 쓰는 능력 역시 충분한 사용과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는 점을 짚었다.
소근육 발달과 글씨 쓰기의 상관 관계
서울대 아동가족학과 최나야 교수는 만 3세에서 6세를 소근육 발달의 결정적 시기로 꼽으며, 이 시기에 손을 충분히 움직이고 사용하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특히 글씨 쓰기를 소근육 발달의 결과가 아닌, 손을 움직이고 사용하는 경험 자체를 늘리는 방법으로 바라보며 글씨 쓰기의 또 다른 기능을 제시했다.
스마트 기기를 일찍 접한 아이들은 화면을 누르고 넘기는 동작에 익숙해지는 반면 연필을 쥐고 힘을 조절하며 선과 글자를 만드는 경험은 줄어들 수 있다. 손을 다양하게 사용하는 시기에 글씨 쓰기를 반복하는 일이 소근육을 실제로 움직이는 경험이 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제작진은 글씨 교육에 열정을 가진 한 초등학교를 찾았다. 이 학교는 1학년을 대상으로 4주간 글씨 교육을 진행하며, 연필 잡는 법과 선 긋기부터 글씨의 크기와 위치까지 체계적으로 지도한다. 4주간의 교육을 마친 뒤 아이들은 글씨뿐 아니라 글씨를 쓰는 태도에서도 변화를 보였다. 글씨를 쓸 때 행동 속도가 느려지고 집중력이 높아지는 모습에서, 글씨 교육이 아이들에게 만들어낸 변화를 엿볼 수 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연필을 올바르게 잡는 법과 선을 진하게 긋는 법, 자음과 모음의 크기와 위치를 맞추는 법까지 기초부터 차례로 지도했다. 교사는 글씨가 모든 학습의 기초이자 자신감 있는 학교생활의 바탕이라고 설명했다.
손글씨로 인한 변화 – 자기 효능감, 기억력, 집중력
제작진은 서울의 한 초등학교 6학년 학생들과 함께 4주간 ‘필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학년 수준에 맞는 소설을 하루 1시간씩 따라 쓰게 한 결과, 아이들의 글씨가 눈에 띄게 바르고 정돈됐으며, 집중 시간도 늘어났다. 필사는 글씨를 바르게 쓰는 연습을 넘어, 아이들이 한 가지 활동에 집중하고 스스로 해낼 수 있다는 경험을 쌓는 과정이 됐다.
참여 학생들은 프로젝트 뒤 책 내용을 이전보다 오래 기억하거나 집중력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했고, 검사에서도 자기 효능감이 높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매일 일정 시간 한 가지 활동을 끝까지 이어간 경험이 글씨 교정과 함께 자신감의 변화로 연결됐다.
손글씨의 변화는 성인의 인지 기능에서도 나타났다. 경도인지장애 성인을 대상으로 한 달간 손글씨 활동을 진행한 결과, 손글씨를 쓴 그룹의 인지 능력은 평균 13% 증가했다. 손글씨가 글씨를 남기는 행위를 넘어 인지 기능의 변화와도 연결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경도인지장애 진단을 받은 한 참여자는 손글씨 연습 이후 기억력이 개선돼 일상생활에서 느끼던 불편이 줄었다고 밝혔다. 어린이와 성인을 대상으로 한 과정 모두 손으로 직접 쓰는 경험 뒤 집중과 기억에서 변화를 관찰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AI 시대, ‘손글씨 교육’의 필요성 강조
현직 초·중·고 교사 6명이 스튜디오에 모여 손글씨 교육의 의미와 경험을 나눴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바른 글씨 쓰기를 지도하는 데 그치지 않고, 글씨를 자신감을 키우는 표현으로 바라보고 쓰기에 대한 동기를 만들어주는 교육의 필요성을 제시했다. 특히 왜 글씨를 써야 하는지, 무엇이 잘 쓰는 것인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를 학생 스스로 깨닫게 하는 교사의 사례를 통해 손글씨 교육이 단순한 글씨 교정을 넘어, 쓰기의 이유와 방법을 스스로 생각하게 하는 교육으로 확장될 수 있음을 제시했다.
경기도의 한 고등학교에서는 정규 수업이 아닌 아침 자습 시간에 필사 활동을 마련해 학생들이 직접 문장을 쓰는 시간을 만들었다. 글씨 모양만 고치는 것이 아니라 손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한 문장을 끝까지 써보는 경험 자체를 교육의 일부로 바라보는 방식이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시 〈풀꽃〉의 작가 나태주 시인은 손글씨를 자기 생각과 마음을 담아 타인에게 전하는 행위로 바라본다. 그의 시선은, 손글씨가 단순한 기록을 넘어 자기 마음과 정성을 상대에게 건네는 소통의 방식임을 일깨운다.
나태주 시인은 손글씨에는 사람의 생각과 영혼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4주간의 글씨 교육과 필사 프로젝트, 성인의 손글씨 활동에서 나타난 변화 가운데 손으로 쓰는 경험의 의미를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장면은 무엇이었을까?
사진 : EB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