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반도의 허리, 휴전선과 맞닿은 강원특별자치도 철원군,
오래도록 전쟁과 분단의 이름으로 기억돼 온 곳이다.
하지만 전쟁의 상처가 가장 깊었던 곳에
평범하고 평화로운 하루가 흐르고 있다.
차가운 철책 너머, 단단한 삶을 일구어 온 철원 사람들을 만나며
‘평화’라는 두 글자의 의미를 찾아 걸어본다.
9월 5일에 방송되는 KBS1 ‘동네 한 바퀴’ 385회에서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 위에 일상을 일군 철원 사람들을 만나며 고석정에서 백마고지까지 이어지는 길에서 평화의 의미를 찾아간다.
수억 년 전으로 떠나는 시간여행! 고석정에서 시작하는 철원 한 바퀴


철원평야의 젖줄인 한탄강은 북한 강원 평강에서 발원해 철원을 지나 임진강으로 흘러드는 강이다. 오래전 화산활동으로 형성된 현무암 절벽과 주상절리, 폭포 등 독특한 지질 경관을 품고 있어 우리나라 최초의 강 중심 지질공원이자 유네스코 세계지질공원으로 지정됐다.
그 한탄강의 절경을 대표하는 곳이 바로 고석정이다. 한탄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높이 약 15m의 고석(孤石)은 약 1억 1천만 년 전 형성된 화강암이 현무암 용암류에 덮였다가 오랜 침식작용을 거쳐 모습을 드러낸 것으로, 주변 절벽과 어우러져 수려한 풍광을 빚어낸다.
고석을 둘러싼 절벽에서는 한탄강이 오랜 시간 깎아낸 현무암 협곡과 화강암 기반암을 한자리에서 마주할 수 있다. 용암이 대지를 덮고 다시 강물이 암석을 깎아낸 시간이 켜켜이 쌓이면서 지금의 고석정 풍경이 만들어졌다.
한탄강의 깊은 시간을 품은 고석정에서 통통배에 몸을 싣고 철원 한 바퀴를 시작한다. 물길 가까이 내려가면 높은 절벽과 홀로 솟은 고석의 크기가 더욱 선명해지고, 철원의 첫걸음부터 수억 년에 걸친 땅의 시간을 마주하게 된다.
지뢰밭에서 평화를 일구다 – 대마리 마을


백마고지 아래 자리한 대마리는 전쟁의 상흔 위에 삶을 일군 마을이다.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뒤 지뢰와 불발탄으로 가득했던 이곳은 1967년 정부의 재건사업에 따라 전략촌으로 조성됐고, 제대군인과 지역주민 등 150세대가 입주해 황무지를 개간하기 시작했다.
정착민들은 먹고살 농토부터 직접 일궈야 했다. 낮에는 거친 땅을 개간하고 밤에는 총을 들고 마을을 지켜야 했으며, 곳곳에 남은 전쟁의 흔적은 농사와 일상의 바로 곁에 있었다.
낮에는 땅을 일구고 밤에는 총을 들고 마을을 지켜야 했던 시절, 곳곳에 묻힌 지뢰와 폭발물로 목숨을 잃거나 다치는 희생도 뒤따랐다. 입주 초기부터 생명을 걸어야 했던 개척의 시간은 지금도 대마리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피 흘려 찾은 땅, 피땀 흘려 개척했다’라는 마을 개척비의 문구처럼, 지뢰밭이던 땅은 오늘날 철원 오대쌀이 자라는 풍요로운 들녘으로 변했다. 황무지였던 땅을 옥토로 바꾼 사람들의 시간이 지금의 넓은 철원평야를 채우고 있다.
전쟁의 상처를 딛고 생명의 땅을 만들어낸 대마리 마을 어르신들을 만나 피땀 어린 삶과 자부심을 엿본다. 부모 세대의 개척을 기억하는 후손들도 이 땅에서 농사를 이어가며 대마리의 다음 시간을 만들어가고 있다.
장모와 사위가 차려 낸 시원달콤한 오대쌀 빙수 한 상


철원군청이 자리한 갈말읍에는 철원을 대표하는 특산물, 오대쌀로 만든 특별한 디저트를 만나볼 수 있다. 새하얀 우유 얼음 위에 찰진 오대쌀을 섞어 식감을 살린 오대쌀크림을 얹고 통팥과 오대쌀 쑥떡, 오대쌀 현미 등을 반찬처럼 곁들여 먹는 오대쌀빙수 한 상이다.
밥상처럼 각각의 재료를 따로 내놓고 취향에 맞게 곁들여 먹는 구성은 흔히 보던 빙수와 다른 모습이다. 쌀을 단순히 토핑으로 올리는 데서 그치지 않고 크림과 떡, 현미까지 다른 식감으로 풀어내 철원 오대쌀을 디저트의 중심 재료로 사용한다.
마치 잘 차려진 오대쌀밥 한 상을 닮은 디저트를 만든 건, 아이가 태어난 뒤 처가댁이 있는 철원으로 온 사위 임형민 씨와 15년 경력의 요리 강사 장모 엄숙자 씨다. 사위가 아이디어를 내면 장모가 맛을 구현하며, 수십 번의 시행착오 끝에 지금의 빙수를 완성했단다.
두 사람의 역할도 자연스럽게 나뉜다. 새로운 메뉴의 방향을 떠올리는 사위와 오랜 요리 경험으로 실제 맛을 잡아가는 장모가 머리를 맞대면서 쌀 한 톨까지 철원의 색을 담은 메뉴가 만들어졌다.
철원 오대쌀뿐만 아니라 파프리카와 토마토 등 철원 특산물을 활용해 새로운 지역의 맛을 담아내고자 한다는데. 철원이 제2의 고향이 된 복덩이 사위와 장모가 함께 만들어내는 철원의 특별한 맛을 만나본다.
한국의 나이아가라를 만나다 – 직탕폭포


한탄강 물길을 따라가다 보면 거대한 현무암 암반 위로 물줄기가 시원하게 쏟아지는 직탕폭포를 만난다. 높이는 약 3m에 불과하지만, 너비가 80여m에 이르는 계단 모양의 폭포로, 넓게 펼쳐진 모습 때문에 한국의 나이아가라라 불린다.
높이보다 폭이 먼저 시선을 압도하는 것이 직탕폭포의 특징이다. 한 지점에서 아래로 길게 떨어지는 일반적인 폭포와 달리 한탄강을 가로지르는 검은 현무암 단면을 따라 물줄기가 넓게 흘러내리면서 독특한 수평 풍경을 만든다.
강물과 현무암이 맞닿은 경계에서는 철원의 지질을 만든 화산활동과 긴 침식의 흔적도 함께 드러난다. 고석정에서 만났던 한탄강의 깊은 지질 시간이 이번에는 거센 물줄기가 떨어지는 폭포의 모습으로 이어진다.
현무암 돌다리를 건너 폭포 가까이 다가가, 까만 현무암과 거센 물줄기가 어우러진 장관을 눈에 가득 담아본다. 물소리가 커질수록 낮고 넓은 직탕폭포의 규모도 더욱 생생하게 다가온다.
내 평화로운 고향, 철원을 담는 지역화가


철원읍 화지리에는 오래된 담벼락과 골목을 캔버스 삼아 고향의 사람과 풍경을 그리는 김선경 작가가 있다. 서울대학교 서양화과를 졸업한 뒤, 어린 시절 바라보던 철원평야와 고향 풍경을 잊지 못해 철원으로 돌아왔다는데.
김선경 작가에게 철원의 들녘은 아름다운 자연만을 뜻하지 않는다. 넓은 논 너머로 DMZ가 이어지는 풍경에는 전쟁 이후 이 땅에서 농사를 짓고 마을을 다시 일군 주민들의 시간이 함께 담겨 있다.
화지리 골목의 담장도 작가에게는 고향의 기억을 남기는 화면이 된다. 마을 사람들의 모습과 일상을 벽에 옮기고 주민들이 그 주변에 꽃과 화분을 가꾸면서 오래된 골목은 사람들의 삶이 이어지는 거리로 바뀌었다.
고향이 자신을 화가로 키워줬다고 말하는 김선경 작가. 그 고마움을 돌려주고 싶은 마음에 6~7년 전부터는 농촌 마을 어르신들을 직접 찾아가 그림을 가르치며 늦깎이 화가들의 꿈도 응원하고 있단다.
철원의 평범한 사람들과 소박한 일상을 화폭에 담아내는 지역 화가의 이야기를 들어본다. 전쟁의 상흔과 평화로운 오늘이 동시에 존재하는 철원의 풍경도 그의 그림 안에서는 주민들의 일상과 함께 기록된다.
현무암으로 만든 철원맷돌, 고석매를 잇는 부자(父子)


제주도를 제외하고 국내에서 유일하게 현무암이 산출되는 철원은 조선시대부터 맷돌을 만들어온 고장이다. 철원 현무암으로 만든 전통 맷돌은 마치 벌레가 먹은 듯 구멍이 숭숭 뚫린 모습이라 하여 고석(蠱石)매라 불리는데, 동송읍에는 그 명맥을 50여 년째 이어오고 있는 백성기 장인이 있다.
현무암의 작은 구멍들은 고석매만의 투박한 표정을 만든다. 단단한 돌을 원하는 크기로 다듬고 위짝과 아래짝이 제대로 맞물리도록 만드는 과정에는 기계만으로 대신하기 어려운 손의 감각이 필요하다.
젊은 시절 영화관 간판을 그리던 화공이었던 장인. 철원으로 돌아와 광고업을 하던 중 철원평야에 지천으로 널린 현무암에 눈을 돌리며 돌과의 인연을 시작했다.
붓을 들던 손이 돌을 다루는 손으로 바뀌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려는 마음은 그대로였다. 주변에서 흔히 보던 현무암을 생활도구로 바라본 뒤 한 번 맺은 돌과의 인연을 반세기 가까이 이어왔다.
이후 전통 맷돌은 물론 자동 맷돌과 원두를 가는 커피 맷돌까지 끊임없이 개발하며 맷돌의 새로운 쓰임을 만들어왔다. 오래된 생활도구를 박물관 속 유물로 남겨두지 않고 오늘의 생활에 맞춰 다시 쓰일 방법을 찾아온 셈이다.
이제는 아들 재현 씨에게 그 기술을 전하며 철원 맷돌의 다음 세대를 준비하고 있다는데. 현무암의 고장에서 태어나 평생 돌과 함께 살아온 그의 단단한 인생을 만난다.
청정 철원평야가 키운 보약 – 농부 부부의 오대쌀 한 상


백마고지 아래 넓게 펼쳐진 철원평야는 밥맛 좋기로 이름난 철원 오대쌀의 주산지이다. 현무암에서 형성된 점토 함량이 높은 비옥한 토양과 북녘에서 흘러드는 청정한 물, 큰 일교차와 풍부한 일조량이 어우러져 쌀알이 단단하고 찰지며, 식어도 밥맛이 쉽게 떨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철원의 긴 겨울과 큰 일교차, 깨끗한 물과 공기는 오대쌀의 맛을 만드는 자연조건으로 꼽힌다. 철원오대쌀은 이러한 지역적 특성을 인정받아 지리적표시 농산물로 등록돼 지역 이름 자체가 쌀의 정체성이 됐다.
철원 동송읍에는 비옥한 땅인 대마리에서 직접 농사지은 오대쌀과 손수 기른 채소로 정갈한 한 상을 차려 내는 부부가 있다. 앞서 지뢰와 불발탄을 걷어내며 개척했던 대마리의 땅이 이제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를 내주는 농토가 됐다.
갓 지은 오대쌀 솥밥에 제철 채소 반찬과 쌀뜨물로 감칠맛을 낸 생선구이와 된장찌개까지. 철원의 땅에서 난 먹거리로 채운 오대쌀밥 정식이 인기인데.
솥뚜껑을 여는 순간 올라오는 밥 냄새에서부터 이 한 상의 중심은 분명하다. 밥을 받치는 반찬들도 부부가 농사지은 채소와 지역에서 난 재료를 중심으로 채워져 한 끼 안에 철원 들녘의 계절이 담긴다.
중국에서 시집와 처음에는 쌀 씻는 것조차 서툴렀다는 백영애 사장님은 이제 누구보다 철원 오대쌀의 맛을 자랑하는 오대쌀 예찬론자가 됐단다. 낯선 지역에서 시작한 삶이 농사와 식당을 거치며 자신의 일상으로 자리 잡은 셈이다.
청정 철원평야에서 부부가 직접 농사지어 차려 낸 한 상에서 오대쌀의 진가와 넉넉한 농부의 밥상을 맛본다. 지뢰밭을 옥토로 바꾼 대마리의 역사도 따뜻한 솥밥 한 그릇 안에서 오늘의 삶으로 이어진다.
정전협정 66년 만에 열린 DMZ 평화의 길 – 백마고지 코스


정전협정 체결 66년 만인 2019년 처음 열린 DMZ 평화의 길은 비무장지대의 생태와 평화의 가치를 직접 걸으며 느낄 수 있도록 통일부가 추진한 길이다. 인천 강화에서 강원 고성까지 총 10개 접경지역, 11개 테마 노선으로 이어지며, 그중 철원 백마고지 코스는 전쟁의 상흔이 짙게 남은 백마고지를 중심으로 약 12km를 걷는다.
백마고지는 1952년 열흘 동안 치열한 전투가 이어졌던 곳이다. 전쟁의 흔적을 기록한 전적지와 전망대를 지나면 지금은 숲과 들판이 된 땅 너머로 당시 격전의 시간이 겹쳐진다.
미리 신청해 신원확인 절차를 거치면 평소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구역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일반 여행지와 달리 정해진 절차와 이동 경로를 따라야 한다는 점 자체가 이곳이 여전히 분단의 경계 가까이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한다.
이곳에서는 1952년 열흘 동안 고지의 주인이 수차례 바뀔 만큼 치열했던 백마고지 전투의 현장을 조망하고, 남방한계선 철책 인근을 걸으며 분단의 현실을 가까이 마주하게 된다.
철책과 초소, 전적지 사이로는 전쟁이 멈춘 뒤 오랜 시간이 흐르며 자리를 잡은 자연도 함께 펼쳐진다. 과거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땅 위에서 생명이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백마고지 코스가 말하는 평화의 의미를 더욱 선명하게 만든다.
아픈 역사의 현장을 직접 걸으며 전쟁의 땅에서 생명과 평화의 땅으로 나아가는 철원의 의미를 되새겨본다. 고석정에서 시작해 대마리 사람들의 삶과 철원평야의 밥상까지 지나온 발걸음이 마지막에는 분단의 현장에서 다시 평화를 바라보게 한다.
전쟁의 가장 깊은 상처가 남은 길에서 평범한 하루와 생명이 이어지는 모습을 만나는 것이 철원 여행의 마지막 장면이다. 수많은 사람이 지켜온 이 길에서 우리가 다시 새겨야 할 평화의 의미는 무엇일까?
전쟁의 상처를 품은 고석정과 대마리에서 시작해 백마고지의 평화의 길까지 이어지는 철원 사람들의 이야기는 9월 5일 토요일 오후 7시 10분에 방송되는 KBS1 ‘동네 한 바퀴’ 385회에서 공개된다.
사진 : KBS